[엔지생각] 2024-04-23일자 큐티 야고보서 1장 19-21절

엔지생각 – 2024년 29일차 큐티 야고보서 1장 19-21절
  • 여는 기도

각자 마음에 따라 기도하심으로 큐티를 시작하시기를 권면합니다.

엔지생각 큐티

 

  • 말씀 묵상 (야고보서 1장 19-21절) 개역개정 + NIV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19. My dear brothers, take note of this: Everyone should be quick to listen, slow to speak and slow to become angry,
20. for man’s anger does not bring about the righteous life that God desires.
21. Therefore, get rid of all moral filth and the evil that is so prevalent and humbly accept the word planted in you, which can save you.

엔지생각 큐티

 

  • 적용

야고보서 1장을 벌써 3일째 보다보니 6~7번은 읽은 것 같다. 생각할 것이 많은 것 같아 아직 넘어가지 않고 있다. 가끔 큐티할 때 영어를 잘하는게 감사할 때가 있다.

사실 잘 못 느낄 때가 많았지만, 이럴 때 언어라는 도구가 도움이 많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사소한 것이지만, 한글로 “너희가 알지니”라고 되어 있지만,

영어로는 “take note of this”다. 이 표현은 오늘 날에도 쓰인다. “주목하라, 주의하라”는 뜻이다. 너희가 알지니라고 하면 안 와닿지만 영어로 보니 더 명확하다. 이런게 감사하다.

아무튼, 물론 그 다음 나오는 내용이 더 중요하겠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어찌보면 누구나 다 머리로 알고 있는 당연한 내용이다.

하지만,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고 늘 잊어버리게 된다. 난 이런 당연한 문구를 볼 때면 생각한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나 그 부분에 대해서 성경에서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흠…한번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듣기는 속히 할까? 일단 누군가가 말을 하면 그 순간 내 귀는 자동적으로 듣는다. 손으로 귀를 막지 않는한 들리는 것을 막을 순 없다.

그렇다면 듣기를 속히 하라는 것은 더 빨리 들으라는 말인데 그게 가능한가? 같은 방에서 대화를 하면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은 동시에 같은 시간에 듣게 된다.

그러나 그 듣는 말을 수용하고,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듣기를 속히 하라는 것은 사람들의 말, 더 나아가서는 그 속에 담긴 생각과 마음을

더 빠르게 수용하라는 말씀 아닐까 생각해본다. 누군가의 말을 수용하려면 일단 그 사람의 말에 관심을 기울이고 누군가의 말을 수용하려면 나의 가치와 판단을 뺀채로 들어야겠다.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말하기는 더디 하며”다. 방금 생각한 것처럼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나의 가치와 판단을 뺀채로 듣지 않으면 중간에 끼어들어서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이건 코칭이나 상담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래서 항상 중립적인 언어를 쓰고 말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상대방의 말과 마음을 굳이 내 말과 마음들로 오염시킬 필요는 없다. 그리고서 마지막이 “성내기도 더디 하라”다. 화를 내는 것은 감정의 영역이라 조절하기란 쉽지가 않다.

하지만 불가능 할까? 순식간에 일어나는 재채기 같은 경우 우리는 얼른 입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리거나 때에 따라서는 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올라오는 화도 우리가 재채기 할 때 입을 손으로 막듯이 어느 정도 절제 되게 표현하거나 참을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그런 마음가짐인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장소 불문하고 큰 소리로 “에~~에~~~취!”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은 입을 안 막는 경우도 있다. 분명 그들도 알 것이다.

누군가는 입을 막거나 조용히 재채기를 한다는 것을, 다만 그들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아닐까? 화내기를 더디하는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되새겨야겠다.

이것이 특히나 중요한 것은 20절 말씀처럼 화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렇게 표현하니깐 뭔가 너무 거창한 것 같다.

영어로 보니 훨씬 더 단순한 의미였다. “for man’s anger does not bring about the righteous life that God desires”, 일단 “bring about”은 가져온다는 뜻이다.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를 가져오다”할 때 그런 “가져오다”, 음, 네이버 사전을 보니 “일어나게 하다, 초래하다”로 쓰여있다. 그 다음 단어는 righteous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도덕적으로 올바른”이다. 즉,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화를 내면 그 화의 대상과 관계가 안 좋아진다. 그리고 내 기분도 안 좋아진다.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일이 갈 수도 있다. 이런 가운데 의로운 삶을 살 순 없겠지.

마지막 21절을 보면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라고 되어있다.

난 사실 반대로 생각했다. 내가 말씀에 힘을 입어야지만 더러운 것과 악을 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나오는 순서는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을 버리고 말씀을 받으라라고 되어있다. 흠…왜 그럴까?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더러운 것….쓰레기를 생각해보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은 일단 같은 공간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냄새나고 세균도 많고 더러우니깐. 그리고 멀리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쓰레기를 처리 혹은 없애는 것이겠지.

우리의 삶에서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은 무엇에 해당할까? 음란함? 부정부패? 범죄? 좀 더 약한 걸 생각해보면 시기? 질투? 게으름?

그런데 이런 걸 다 버린다고 가정하면 완벽한 삶을 살라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한 얘기인가? 음….하긴, 생각해보니 쓰레기를 한번 버린다고 해서 계속 안생기는 것은 아니네…

항상 1주일에 1번은 일반 쓰레기, 거기에 때로는 음식물 쓰레기도 버릴 때도 있고, 1주일에 1번은 재활용 쓰레기도 버리는구나.

마찬가지로 내 삶의 더러운 것과 악한 것도 계속해서 버려야 하는 것이겠구나. 그 버리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 같다. 현실에서도 쓰레기 버리는 것을 게을리 하면

건강한 집안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힘드니깐, 더러운 것과 악한 것을 안버리면 의로운 삶을 살기 힘든 것이겠지. 음….아멘….

엔지생각 큐티

 

  • 마치는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마음과 삶의 여러 영역을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방향을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듣기는 속히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하게 하시고 내가 늘 내 생활과 삶을 돌아보며 내 마음과 행동을 정돈하여 더러운 것과 악한 것들을 멀리하게 해주세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게 하시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 하나님의 은혜에 힘 입어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당하게 해주세요.

날마다 내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실 것을 믿으며 의심하지 않겠으니 이를 내가 날마다 체험하며 살게 하시고 항상 체험할 때에 이것이 하나님꼐로 부터 온것임을

알게 해주세요. 이 모든 말씀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Leave a Comment